오늘(5월 24일) 조선일보에 '한국 방송사극의 개척자'라며 신봉승 작가의 인터뷰가 크게 실렸다. '조선왕조 500년' 등을 쓴 방송작가 신봉승을 두고 '한국 방송사극의 개척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딴지 걸고 싶지 않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인터뷰 전반에 흐르는 조선일보식의 낙인찍기와 좌파 흠집내기는 참으로 지켜보기 민망하고, 안쓰럽다. 이런 인터뷰에 '한국 방송사극의 개척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것도 참 민망하고, 그래서 그 이름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신봉승 작가 인터뷰 기사 제목은 <"좌파 10년간 우리 역사를 부정하다 보니 정사가 희화화돼">이다. 인터뷰 내용을 좀 살펴보자.

5월 24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신봉승 인터뷰


인터뷰를 진행한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가 "최근에는 영조의 모친을 다룬 '동이'가 인기다. 사극작가로서 요즘 사극들을 보는가?"라고 묻자, 신봉승 작가는 "몇 차례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때부터 보지 않는다"며 "'동이'도 요즘은 보지 않는다"고 답한다.

이한우가 재차 "'동이'도 아니다 싶은가?"라고 묻자, 신봉승 작가는 "그보다 왜 최근 몇년간 우리 사극들이 이렇게 됐는지를 말하고 싶다" "아마도 요즘 같은 작품들은 10여년 전 방송사 간부들의 수준이었다면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갑자기 '지난 10년'으로 이야기를 옮겨간다.

신봉승 작가는,

적어도 사극이라면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저변에 까는 역사인식이 기본인데, 우리 사극에는 '국가적 맥락'이 없다고 한다. '동이'의 경우 숙종 같은 인물을 '깨방정'과 연결짓는 것은 아예 사실이 아니며, 기초적인 사실도 모르는 "왜곡된 군주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요즘 사극들은 역사 속의 이름만 빌려왔을 뿐 한편의 활극이나 사랑타령일 뿐이다. 재미만 추구한다. 그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제작진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사극 제작자들을 강도높게 비판한다.

최근의 사극을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야 빈번하게 벌어졌으니 이런 비판도 할 수 있다. '사극에 국가적 맥락이 없다'며 '사극이라면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깔아야 한다는 비판도 나름의 사극관이 박힌 우국충정의 할아버지로서 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신봉승 작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신봉승 작가는 뜬금없이 '재미만 추구해 폐해가 심각한 사극'의 탓을 "10년 좌파정권" 탓으로 돌렸다.

이한우가 "우리 방송의 사극은 왜 이렇게 됐는가?"라고 묻자, 신봉승 작가는 "역사의식을 가진 작가, 국가적 맥락의 중요성을 아는 작가가 거의 없다" "지난 10년 좌파정권이 방송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뒤집어보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것이다.

'한국 방송사극의 개척자'가 TV 사극에까지 10년 좌파정권 탓을 늘어놓는다?
참 재밌는 세상이다. '좌파정권'이 존재할 때도 마녀사냥을 당했던 '서울 1945'를 두고 신봉승 작가가 "어떻게 KBS가 좌파를 미화하고 건국대통령을 비하하는 '서울, 1945'라는 드라마를 버젓이 내보낼 수가 있는가?"라고 질타하는 거야 그러려니 하자. 웃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장희빈이나 최숙빈을 재해석한다면서 '깨방정 숙종'을 만들어내는 것과 명치시대와 료마를 재조명하는 일 중 어느 쪽이 국가적 맥락에 기여하는가?"라고 사극을 두고 "국가적 맥락에 기여" 운운하는 것은 목불인견, 토가 쏠리기까지 한다.

도대체 '동이'와 '좌파정권'이 무슨 상관이고, 도대체 사극이 왜 "국가적 맥락에 기여"해야 된단 말인가? '동이'가 무슨 '반국가적 드라마'라도 된다는 건가?


신봉승 작가의 눈에는 '대장금' 같은 사극도, '허준' 같은 사극도, '다모' 같은 사극도, '바람의 화원' 같은 사극도 모두 '좌파정권' 하에서 만들어진 정사를 희화화하고 재미만 추구해 사회에 폐해를 끼친 작품들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 '바람의 화원'을 두고는 "멀쩡한 남자인 신윤복을 여자라고 해놓고 사극 운운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극들이 이른바 '국민드라마'에 등극해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 당시에 신봉승 작가가 나서서 '좌파'가 어떠니 '국가적 맥락'이 어떠니 하는 소리를 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왜 10년 좌파정권 다 지나고 나서야 이런 얘길 하시나? 일말의 진정성도 없어 보일만큼 비겁하게 말이다.

신봉승 작가는 '서울 1945'를 들어 참여정부 시절 KBS를 맹비난했다. 그럼 한 번 물어보자.
참여정부 시절 KBS에서 제작된 '불멸의 이순신'은 어떻게 보셨나? 그 드라마는 국가적 맥락에 기여했나, 하지 않았나? '대왕 세종', '대조영'은 또 어떻게 보셨나? 국민의 정부 시절 제작된 '태조 왕건'은 어땠나?

신 작가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지금 사극의 흐름을 자신 있게 비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바로 그런 오류에 빠져 있다가 스스로 힘겹게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물어보자. 당신이 오류에 빠져 있을 때가 '좌파정권' 때였냐고? 당신은 그냥 '개인의 오류'고 후배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 만드는 건 좌파정권 때문이냐고?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신봉승 작가가 한국 방송사극을 개척할 당시에는 '조선왕조500년'처럼 오로지 왕(그것도 주로 조선시대의 왕)과 그 주변의 이야기만이 사극이 될 수 있었다면,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 방송의 사극은 눈부시게 발전해왔다.

소재도 무궁무진해지고, 다루는 방식도 다양해졌으며, 왕과 그 주변 인물 뿐만 아니라 지난 역사를 살아온 그 누구나 사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노비가 주인공이 되고 노비를 쫓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추노'같은 드라마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 재미만 추구한 드라마고 폐해를 끼쳤다고? 좌파정권 때문에? 이러니 나 같은 어린 사람도 당신 같은 분을 어른으로 공경할 수 없고 한심하고 불쌍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아마도 신봉승 작가 같은 분은 다시 태어나 방송작가가 되더라도 '추노' 같은 드라마는 꿈에라도 만들 생각을 못할 것이다. 아니 이런 인터뷰가 조선일보를 통해 대서특필되는 시대이니, 앞으로 어쩌면 '추노'같은 드라마는 더 이상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이런 분을 인터뷰해 "좌파 10년" 운운하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써붙인 것도 다 이유가 있고 그 영향이 있지 않겠는가.

만약 내가 좋아했던 지난 10여년 동안의 새로운 사극들이 정말 지난 정권 때문이었다면, 나는 더욱 지난 정권이 그립다. 제작자들의 창의성이 빛을 발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준 그 시절이 정말 그립다.

'다모'가 좌파정권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는 이런 드라마 보기 위해서라도 10년 아니 100년 좌파정권 밑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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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5.2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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