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월드컵에 출전중인 북한 대표팀이 어제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연합뉴스가 기사를 썼는데, 아주 우습다.

<북한, 어색한 분위기 속 기자회견>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 의하면 북한 대표팀의 기자회견은 "정치적인 질문은 전혀 받지 않겠다고 주의를 환기하는 것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피파에서 북한 대표팀에 배정한 미디어 담당관이 기자회견에 앞서 "정치적인 질문은 전혀 받지 않기로 했으니까 축구 경기과 관련된 질문만 하라"고 당부했던 것.

그런데 첫 질문부터 꼬인 모양이다.

첫 질문자로 나선 한국 기자가(어느 매체의 어느 기자인지는 모르겠다) "북한은 예선에서 수비적인 전략을 써왔는데 본선에서도 그 전략을 유지할 계획인지, 핵심 선수가 누구인지 꼽아달라"고 북한 대표팀 김정훈 감독에게 질문했는데, 김 감독이 "북한이라는 나라는 없다"며 "다음 질문을 받겠다"고 한국 기자의 질문은 거부한 것이다.

해당 연합뉴스 기사


이를 두고 연합은 "첫 질문부터 분위기가 냉랭해졌다"며 "정치적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도 오로지 경기 자체에 대한 질문에도 스스로 철저히 정치적이었던 모습"이라고 북한 대표팀을 힐난했다.

연합은 "북한이 '북한'이라는 말을 전쟁의 '미수복 지역'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반도를 외세에서 일제강점기 전으로 해방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조선'이라는 말을 선호한다는 게 일반적 견해"라는 해설도 덧붙였다.

자, 여기까지 한 번 살펴보자.

일단 북한 선수단을 '대표'하는 감독이 자기들을 두고 "북한"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연합뉴스가 해설한 그것 때문이 아니다. 물론 '북한'이라는 용어의 내포된 의미 가운데 한국(남한)의 관점에서 '미수복 지역'을 의미하는 것도 없지는 않지만, 이걸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쉽게 이야기해보자.
남한, 북한이라는 용어는 '한국의 남쪽', '한국의 북쪽'이라는 의미다. 즉 '북한'이라는 용어는 '한국의 북쪽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이라는 나라, 즉 국가는 존재하지만 '북쪽'이 따로 지칭하는 국가는 없다. 즉 한반도의 유일국가를 '한국'으로 해석할 때 나올 수 있는 용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라는 용어는 한국(남한)의 입장에서는 쓸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통용될 수 있는 용어이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사실 이 정도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설명해보련다.

북한의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줄여서 북한측 입장에서는 '조선' 또는 '공화국'이라 부르며 남한을 지칭할 때는 알다시피 '남조선'이라 한다. 영문으로는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고, 줄여서 DPRK이다. 즉 북한 입장에서는 멀쩡한 자기네 나라 이름을 두고, 자기들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북한'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북한'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잠깐 다른 문제를 하나 짚어보자.

흔히 영어로 남한과 북한을 지칭할 때 'South Korea'와 'North Korea'라는 용어를 쓴다. 흔히 Korea라고 하면 대한민국을 의미하는데, North Korea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북한이 거부하지 않는다. 스포츠 국제 경기를 하거나 외신에서 다룰 때 북한을 North Korea라 지칭했다고 하여 이를 문제삼았다는 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이유는 북한이 North korea를 '북한'으로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한반도의 북쪽'으로 받아들이거나, 북한의 정식 영문 명칭에서 보다시피 자기들도 Korea라고 스스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Korea는 '고려'에서부터 한반도를 지칭하는 국제적 용어이기 때문에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연합뉴스가 북한 김정훈 감독의 반응을 보며 "오로지 경기 자체에 대한 질문에도 스스로 철저히 정치적이었던 모습"으로 해석한 것은 그 자체가 '북한'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정치적 민감성, 역사성 그리고 북측의 입장에 대해 철저히 무지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코미디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 기사를 작성한 연합뉴스 장재은 기자는 "기사 작성실로 돌아간 한국 취재진에는 한국 기자의 첫 질문이 퇴짜를 맞은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해외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고 외신 기자들은 이를 '분단의 잔재'로 해석했다"는 문장으로 기사를 마무리지었다. '분단의 잔재'라는 해석은 전혀 틀리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분단의 잔재에 매몰된 한국 언론인의 현주소'라고 해야 더욱 적절한 설명인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그러니깐 1995년 8월 15일. 남북이 해방과 함께 분단된지 50년이 되는 그 해. 한국의 언론인들을 대표하는 3개 단체(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는 <평화통일과 남북화해·협력을 위한 보도·제작준칙>을 제정, 발표했다.

펼쳐두기..



전문에서 "우리 언론이 통일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한 다짐으로 공동의 보도·제작 규범을 제시한다"며 " 먼저 남과 북의 평화공존과 민족동질성 회복에 힘쓰며, 민족공동의 이익을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남과 북이 단결하여 자주적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한다"고 밝힌 이 준칙은, 총강의 첫째 항목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약칭: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약칭:조선)으로 나누어진 남과 북의 현실을 인정하며, 상호존중과 평화통일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상대방의 국명과 호칭을 있는 그대로 사용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하지만 이 다짐과 스스로의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내부에서 북을 언급할 때야 이런 스스로의 다짐을 지킬거라 언감생심 기대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국제무대에서나 남북대화 등 면대면으로 북한을 공식적으로 대할 때만이라도 '남과 북의 현실을 인정'하고 '상호존중'하는 차원에서라도 '북한'이라는 용어를 자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굳이 '공화국'이나 '조선'이라고까지 표현할 것도 없다. '북' 혹은 '북측', '귀측'이라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대표적으로 오늘로 탄생한지 10주년이 되는 '6.15 남북공동선언문'에는 남과 북의 정상이 직접 서명한 문서인데도, '남한'이니 '북한'이니, '북조선'이니 '남조선'이니 하는 용어는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그저 '남과 북', '남북'으로 표현됐을 뿐이다.

아무리 '6.15 남북공동선언'이 휴짓조각이 됐다고 해도, 북쪽 사람을 눈앞에 두고 '북한' 어쩌고저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몰염치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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