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 살아있다” 오보 뒤통수 맞은격…분발해야


〈한겨레〉 독자들은 6월23일 아침 배달된 신문을 보고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1면 머릿기사에 올라와 있던 ‘김선일씨 살아있다’는 큼지막한 제목 때문이었다. 그 옆에는 ‘온국민 무사귀환 팔걷었다’는 기사도 함께 있었다. 아침 방송뉴스를 통해 고 김선일씨의 끔찍한 참수 소식을 접한 다음 눈에 들어온 〈한겨레〉의 기사들은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24일 〈한겨레〉가 “이 비극적인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통감한다”며 사과문까지 게재했고, 〈한겨레〉 구성원들도 당혹감을 느꼈을 테지만 ‘독자’로서 느끼는 문제점을 ‘한겨레비평’을 통해 솔직히 전달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믿는다.

내가 소속된 단체는 아침에 배달된 중앙 일간지들을 모두 모니터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한겨레〉를 펴든 뒤, 곧 이어 차례로 확인한 ‘조·중·동’의 보도는 〈한겨레〉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 크게 했다.

물론 거대 족벌신문들에 비해 제작환경이 열악함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한겨레〉를 제대로 키워야겠다는 애독자로서의 ‘사명감’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모든 이목이 집중된 사안에 대해서조차 〈한겨레〉가 수구신문들의 ‘민첩함’에 비해 ‘차별성’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그 동안 ‘이라크 파병’ 문제에 있어 〈한겨레〉가 그 어떤 언론보다 가장 올바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하다.

〈한겨레〉와 독자들의 ‘뒤통수’를 친 가장 큰 ‘책임’은 뭐니뭐니해도 ‘미국’에 있다. 미국이 일으킨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 고 김선일씨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 김선일씨 죽음의 직접적인 책임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가 23일자 사설 ‘김씨 납치를 알리지 않은 미국’에서 지적했듯 김선일씨의 절규가 〈알자지라〉를 통해 방송된 21일 이전에 이미 미국은 김선일씨의 피랍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한국 정부에 알리지 않았다는 강한 의혹을 받고 있다. 오히려 미국은 김선일씨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붙잡혀 있던 19일 팔루자 지역에 미사일 공격을 가해 어린이와 여성 등 민간인 22명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한국 정부의 순발력있는 대처 기회를 앗아갔을 뿐 아니라 이라크 저항세력을 자극해 ‘참수’를 부추겼던 것이다. 결국 너나 할 것 없이 미국으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고, 무방비 상태로 ‘오보’가 속출하게 되었다. 독자는 물론, 〈한겨레〉도 미국에 뒤통수 맞은 격이다.

미국이 왜 그랬는지 그 의도는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레〉가 사설에서 “만약 미국 정부가 우리 정부의 파병 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봐 알리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물론, 지구촌 전체의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정도로 비판한 것은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특히 “현지 미군 차원의 전술적인 판단이라 하더라도…” 운운한 대목은 이해할 수도 없다. 〈한겨레〉 구성원들이, 특히 미국 관련 소식을 다루는 기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 ‘미 제국주의’의 추악한 본질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23일 3면 ‘유력인사 통해 납치단체 간접접촉’의 “한-미 정보 공조”에서 현지 미군 당국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는 정부쪽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다룬 것도 같은 이유에서 지극히 실망스럽다. 미국이 우리 정부를 속이고 있음을 사설에서까지 지적해놓고 이런 보도가 버젓이 나가는 시스템도 이해가 잘 안 된다.

〈한겨레〉 독자들을 뒤통수 맞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은 우리 언론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외신 만능주의’다. 〈한겨레〉를 비롯한 거의 모든 언론의 오보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알아라비야〉의 22일 저녁 보도였다. 한정된 정보 중에서 유력 아랍방송의 보도가 가지는 무게가 크겠지만 사안의 중대함을 감안할 때 〈한겨레〉가 얼마만큼 ‘신빙성’을 따지는 노력을 했는지 의문이다. 판단하건대 〈한겨레〉는 정보분석 노력보다는 ‘알 아라비야 어떤 방송’(5면)처럼 〈알아라비야〉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감을 높이는 데 더 성의를 보였다. 과연 이라크에 몇 명의 기자들을 특파원으로 보내기도 했던 〈한겨레〉에 이라크 현지 동향과 정세를 제대로 분석할 만한 역량이 없는 것인가.

〈한겨레〉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이번 일이 〈한겨레〉가 더욱 분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적어도 미국에 대해 ‘가장 원칙적인 자세’를 견지해 줄 것을 당부한다. 자국민의 목숨보다 미국과의 동맹을 중요시하는 수구신문들이 세상을 흔들고 있는 지금, 우리는 〈한겨레〉를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04년 6월 24일자 한겨레신문 '한겨레비평' 코너에 기고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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