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를 보며 새삼스럽게 든 생각은, 역시 드라마는 뭐니뭐니 해도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소재가 좋아야 하고, 그 소재를 재미난 이야기로 엮어내야 하며, 그 이야기를 눈에 잘 들어오게 꾸며야 한다.

글로 쓰고 말로 내뱉는 건 무지하게 쉽다.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완결된 창작물, 드라마로 만들어내는 작업은, 아마도 해본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좋은 소재'의 조건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소재라면 충분히 '좋은 소재'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로 그런 소재를 갖췄다.

 

'한글 창제 과정의 미스터리'

지금껏 무수히 많은 사극이 조선왕조를 다루고, 그 중에서도 태조 이성계부터 연산군에 이르는 왕들을 얼마나 많이 다뤄왔던가. 하지만 그 어떤 사극이 '한글'을 다룬 적이 있었나. 하물며 조선왕조 500년을 통털어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조차 사극의 히어로로 등극한 것은 2008년 '대왕 세종'이 처음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한글', 하지만 아직 드라마에서 다뤄지지 않은 '한글'. 이보다 대중적이면서 신선한 소재는 찾기 힘들 것이다.

물론 이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성취라기보다는 원작인 소설 '뿌리깊은 나무'의 공이다. 여기서 사극은 물론 모든 영상콘텐츠의 또 다른 '기본'이라 할 수 있는 1차 저작물(만화, 소설 등 원작 콘텐츠) 활성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훌륭한 원작에 기반한 훌륭한 '2차 콘텐츠'라는 점만 짚고 넘어가자.

원작의 힘은 '뿌리깊은 나무'가 재미난 스토리를 갖춘 드라마가 될 수 있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드라마 작가들이 보기 좋게 재가공을 한 공도 빼놓을 수는 없다. 여기에 연출의 힘과 한석규로 대표되는 연기자들의 호연이 더해지면서, '뿌리깊은 나무'는 기본에 충실한 드라마이자 제목처럼 스스로 '뿌리깊은 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


"꽃은 꽃일뿐 뿌리가 될 수 없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 집단의 중요성을 집약한 정도전과 밀본, 정기준의 말이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글 창제로 더욱 격화된 왕권과 신권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상적인 문장이다.

여기에 빗대자면, 뿌리가 깊고 튼튼한 나무에서 꽃도 만발하고, 좋은 열매가 맺힌다. 물론 날씨의 영향 등 주변환경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드라마로서의 충실한 기본 즉 뿌리를 갖췄고, 그 뿌리에서 완성도 높은 훌륭한 드라마 즉 꽃이 피었다.

그런데 '뿌리깊은 나무'의 꽃이 더 돋보이는 것은 그 꽃이 한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도 새로운 꽃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꽃은 단지 '뿌리깊은 나무'만이 피워 낸 꽃이 아니라 지금껏 다양하고도 새롭게 변화해 온 우리 방송 사극의 여러 도전과 성과에도 그 뿌리가 닿아 있는 꽃이기에 더욱 의미있다.

그 꽃을 꼽자면 이렇다.

 

먼저, '뿌리깊은 나무'는 미스터리 사극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집현전 학사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그 장면들에서 '다모' 이후, '한성별곡 正', '정조암살 미스터리 8일',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으로 이어져 왔던 우리 사극의 새로운 흐름이 '뿌리깊은 나무'에도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뿌리깊은 나무'는 무협액션 사극이기도 했다. 이방지와 무휼, 강채윤과 윤평, 그리고 개파이와 심종수, 견적희까지 무림의 고수들이 대거 등장해 활극을 펼치는 모습은 한 편의 무협극 그 자체로 '뿌리깊은 나무'를 보는 또 하나의 커다란 재미를 선사했다. 우리 사극에서 무협액션의 연원을 파고 들어가자면 '암행어사'의 산도까지도 갈 수 있겠으나, '뿌리깊은 나무'가 보인 액션은 '강채윤' 장혁의 전작 '추노'와 연결시키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무엇보다 '뿌리깊은 나무'는 한편의 정치극이자 시대극이었다. 세종과 밀본의 경쟁, 모략과 암투, 술수 뿐 아니라 '정치'의 가치에 대해서는 '100분토론'을 능가할 정도의 깊이있는 토론까지 담아냈다. 볼거리 많았던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과 정기준의 두차례 토론은 아마도 백미로 꼽힐만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나아가 600여년 전 조선을 빗대 오늘의 정치상황을 되돌아보게 만든 것은 '선덕여왕'과 '추노' 등 최근 우리 사극의 또 다른 성과가 '뿌리깊은 나무'에도 면면히 이어져 있을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더 빛을 발함을 확인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뿌리깊은 나무'는 한편의 다큐 못지 않은 교양 드라마였다. 누군가가 '한글헌정드라마'라고 하던데,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한글의 우수성을 그 어떤 교양프로그램보다 더 효과적으로 확인시켜줬고, 한글에 대한 사랑을 일깨웠다. 학교를 다니는 아들딸이 있다면 꼭 보여주고 싶은 드라마였다.

 

그뿐인가? '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인지, 정치가 왜 필요한지, 소통과 토론이 뭔지, 역사의 발전이 어떤 것인지 등 군주제인 조선을 통해 오히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이 갖추고 알아야 할 것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올해 우리 방송에 등장한 그 어떤 다큐멘터리, 그 어떤 교양프로그램보다
'뿌리깊은 나무'는 교양적이면서 시사적이었고,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다채로운 색깔이 한 데 어우러져
 '뿌리깊은 나무'는 그 자체로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사극으로 활짝 꽃필 수 있었다. '뿌리깊은 나무'의 줄거리와 재미를 넘어 드라마적 가치에 의미를 두는 이유이며, 평가받을만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뿌리깊은 나무'의 성취는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jTBC의 '인수대비'와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과연 비교 대상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멀리는 '조선왕조 500년'이나, 기껏해야, '왕의 눈물
'이니, '여인천하'와 같은 예전 사극을 그대로 좇아 만든 드라마가 한 방송사의 개국 특집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상황이고, 나아가 그런 사극이 '진짜 사극'이고, 나머지 새로운 사극의 시도들을 '역사 왜곡' 등으로 폄하하려는 시도까지 존재하니, 그 속에서도 면면히 방송사를 달리하면서 이어져오는 새로운 사극을 만나는 즐거움은 매우 크다.


작년엔 '추노', 올해는  '뿌리깊은 나무'.
내년엔 또 어떤 드라마가 이런 즐거움을 선사하게 될까?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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