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아니 OO일보 방사장의 2012년 신년사가 재밌다.

해마다 언론사 사장이란 사람들이 '신년사'를 내놓고 어줍잖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만, 올해 방사장의 신년사는 한 번 짚어볼 만 한 것 같다.

지난해 12월 TV조선을 개국시키고, 나름 올해의 도약의 해로 설정하고 있는 포부, 그리고 야심만만하게 원하던 방송을 출범시켰지만 그리 녹녹치 않은 현실에 대한 나름의 진단, 여기에 언론사로서의 신뢰성에 대한 끊임없는 외부의 지적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 찾기 등이 방사장의 신년사에 녹아 있기 때문인다.

그래서 북한의 새해 신년사도 아닌, 가카의 신년사도 아닌 OO일보 방사장의 신년사를 따져보고자 한다.

방사장과 가카(사진-오마이뉴스)


방사장의 신년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다음과 같다.

TV조선은 아직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지만 우리는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2월부터 우리가 정성껏 준비한 프로그램들이 본격 방영되면 TV조선의 진면목이 서서히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앞으로 TV조선이 가야할 멀고 먼 여정을 생각한다면 첫 걸음부터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굳게 지키며 내실을 다지는데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내용은 "TV조선은 아직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TV조선이 가야할 멀고 먼 여정을 생각한다면 첫 걸음부터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는 부분이다.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은 역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다"는 의미일테다.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연일 TV조선에 대한 자화자찬을 늘어놓더니, 웬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0%대 시청률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CEO가 "조선일보가 1등신문"이라는 것처럼 "내가 제일 잘나가" 식으로 떠들어댔다면 그야말로 웃음거리였을테다. 그나마 현실을 조금은 정확하게 '인정'하고 것이다.

조중동종편 합동개국식날.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방사장, 바로 옆은 최시중(사진-오마이뉴스)


"첫 걸음부터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는 부분은 애처로움과 연민까지 자아내게 만드는 슬프디 슬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방사장의 언급은 '일희'보다는 '일비'에 방점이 찍혔을 터, TV조선은 물론 조선일보 내부가 0%대 시청률 등에 얼마나 많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지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TV조선이 가야할 멀고 먼 여정을 생각한다면"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방사장이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조선미디어그룹의 모든 계열사들이 힘을 하나로 모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등 방송으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 대목은 솔직히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이 들게 한다. 조선일보가 허구한 날 1면에서 TV조선을 홍보하고, 자랑하는 것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더 하게 될까? 가카처럼 언제나 상상 이상인 조선일보가 또 얼마나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주게 될까?

"1등 방송으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것"이라는 비장함이,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 그 자체는 조소를 자아내는 코미디지만, 이 집단이 그 동안 보인 패악질을 생각한다면 그저 웃음거리로만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

방사장의 신년사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한 군데 더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사원 여러분.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나는 이 나라가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문 업계 종사자의 말이 아닙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가 남긴 말입니다. 단편적인 정보의 파편이 아니라 정보의 맥락과 중요도를 짚어주는 언론의 고유 기능을 평가한 것입니다.

아...방사장이 스티브 잡스를 인용했다.

스티브 잡스의 그 많고 많은 어록을 다 놔두고,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단편적인 정보의 파편이 아니라 정보의 맥락과 중요도를 짚어주는 언론의 고유 기능을 평가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스티브 잡스의 몇 가지 어록


그런데 잡스가 이 말을 한 배경을 안다면 이렇게 인용하긴 힘들다.

배경은 이렇다.

아이폰4가 출시되기 애플의 엔지니어인 그레이 파월이 술에 취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이폰4의 프로토타입을 분실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어떤 청년이 주워서 IT전문 블로그 '기즈모도'에 5,000달러를 받고 판다. 그리고 기즈모도는 아이폰4 프로토타입에 대한 사진과 동영상을 포스팅해 스펙을 공개하게 된다.

이후 애플은 분실된 기기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는 공문을 기즈모도에 보내고, 경찰에 수사까지 의뢰해 분실된 아이폰4 프로토타입을 산 기즈모도의 블로그에디터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바로 이 사건에 분노한 잡스가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기 맘대로 정보를 공개한 기즈모도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맥락을 따져보자면 블로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다분히 실린 발언인 셈인데, OO일보 방사장은 하필이면 이 말을 인용해 기성 제도권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 것이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의 출시를 준비하고 있던 잡스로서는 이런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OO일보 방사장은 다르다. 자기들 마음대로 신상을 털고, 정보를 왜곡하고 과장하고 축소하는 조선일보의 그간 행태를 볼 때, 잡스의 말을 한국적 상황에 대입하게 되면 "한국이 조선일보의 나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가 되지 않을까?

나아가 잡스는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조선일보는 아예 "건강한 언론"이 아니지 않나.

2001년 탈세, 횡령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구속됐던 방사장(사진-오마이뉴스)


방사장은 "지금 인터넷 방송이나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서는 근거 없는 헛소문이 난무하고 얼굴을 숨긴 잔인한 인격살인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끈질긴 취재를 바탕으로 하는 정확한 보도와 객관적인 논평, 그리고 깊이 있는 해설을 통해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뉴스의 '진실'을 보도한다면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헛소문과 익명 비방, 음모론들은 자연스럽게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을 위협하는 '나는 꼼수다'와 SNS를 비방한 것인데, 전직 대통령까지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잔인한 인격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조선일보가 할 말은 아니다. 그리고 조선일보가 방사장이 밝힌 '정확한 보도', '뉴스의 진실 보도' 등은 할 일이 없을테니 '나는 꼼수다'와 SNS의 위력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머지 몇군데도 코웃음나는 대목이 없진 않으나, 이쯤 하자.

혹시 방사장의 신년사 전문을 보고 싶은 분이 있걸랑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라.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2012년 신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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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12.01.04 13:52
  2. 속이 다 시원하네요!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그 신문은.. 답이 안 나와~
    ㅋㅋㅋ

    2012.01.04 13: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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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구멍에 코딱지가 앉았을 때, 코에 먼지와 온갖 잡것들이 쌓였을 때, 그래서 뭔가 찝찝하고 불편하고, 때론 숨쉬기가 힘들 때, 코 한 번 시원하게 후비고 큰 덩어리를 파내고 나면 가슴 속까지 후련함을 느낍니다. 방송을 보면서, 미디어를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뭔가 찝찝함', '뭔가 불편함', '뭔가 파헤쳐야 하는 궁금함'을 시원하게 후벼볼랍니다. 미디어, 누구나(who) 후벼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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